#광주밤지도 #대전밤지도 #울산밤지도 #세종밤지도 #경기밤지도
#강원밤지도 #충북밤지도 #충남밤지도 #전남밤지도 #전북밤지도
#경남밤지도 #경북밤지도 #제주밤지도 #밤지도 #밤지 #밤도 #지도
https://bamjido2.com
엄청난 피해를 남긴 한국전쟁은 황학동 일대에도 큰 변화를 몰고 왔다. 한국전쟁 당시 기존에 황학동과 왕십리 등에 있던 주택들이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공병대는 오늘날 중앙시장이 있는 자리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다가구주택인 이른바 재건 주택을 건설했다.
한편 집을 잃고 떠도는 수많은 피란민들과 월남자들은 청계천 주위에 판잣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주거 공간을 확보한 피란민들은 고물상을 하거나 노점을 하며 생계를 도모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인근의 황학동의 주거지로 유입되었다. 훗날 황학동에 벼룩시장이 들어선 것도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서울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성동시장은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상인들은 가건물을 지어 장을 개설했고, 시장의 위치도 신당동 140-28번지로 이전했다. 이때 시장은 점포 수가 223개로 1949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남대문시장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
성동시장은 1962년에 성동중앙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중앙시장의 1950년대 주요 거래 품목은 쌀이었다. 1953년 서울 시민이 소비하는 양곡의 약 70% 이상을 중앙시장에서 거래했을 정도로 엄청났다. 지방에서 집산된 쌀을 비롯한 콩, 보리, 잡곡 등의 양곡이 철도를 이용해 용산역에서 집하하고, 용달차를 이용해 중앙시장으로 옮겼다가 서울과 수도권으로 배송하는 구조였다.
이 무렵 중앙시장은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과 함께 서울 3대 시장의 하나로 손꼽혔다. 1950년대에는 중앙시장에서 양곡을 다루는 점포가 800곳이나 되었다.
이처럼 양곡을 중심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중앙시장은 1970년대까지 경기도 북부 지역과 동부 지역의 농산물뿐만 아니라 전국의 양곡상과 연계되어 있었고, 고추, 참기름, 채소 등의 거래도 활발했다.
그러나 1965년 정부에서 쌀값을 비롯해 서울 시민이 먹는 쌀의 수요와 공급을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시장은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정부가 정부미를 방출하면서 양곡시장으로서의 중앙시장은 크게 위축되었다. 1960년대 후반 중앙시장에는 양곡을 취급하는 점포가 120곳으로 크게 줄어 있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